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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고 나서도 베로니카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베로니카는 조그만 기차 창문에 입김을 불어 넣어 그 위로 여러 개의 단어를 써 내려갔다. 영구 기관, 표절, 장원, 역행, 순리…. 어린애 장난처럼 손끝에 힘을 주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자니 옆자리의 승객이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베로니카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손가락이 누군가의 이름 위에서 멎을 때까지. 그녀가 한 번도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 없으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오직 그만을 위해 수십 수백 번 편지지에 옮겼던 그 이름.
결국 베로니카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장원으로 떠나는 날까지, 알바는 그녀에게 답신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편지를 읽기는 했을까? 그동안의 편지 왕래는 난관에 봉착한 실험과 표절 시비 양쪽에 시달리는 알바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기나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베로니카는 물기 어린 뿌연 창문을 옷소매로 대강 문질러 닦고 덜컹거리는 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사실 장원이라는 곳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런 범상한 인용 구절을 가져다 대기도 무안할 정도로 그저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자신이 수년간 진리로 믿으며 탐구해왔던 거대한 학문을 송두리째 무너트릴지도 모르는 작은 파편을 지나칠 만큼 베로니카는 나태한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눈과 귀를 굳게 닫을 만큼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섭리에 어긋나는 현상이 장원에서 관측되었다. 신의 섭리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우주의 규칙이라고 믿는 신학자들은 그 현상을 검증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니까. 그러나 베로니카는 낯선 땅으로 미지의 모험을 떠나기를 선택했다. 창에 꿰 찔린 옆구리의 상처와 손발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야 신을 인정했던 의심 많은 사도와 같이, 베로니카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섭리’가 어긋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절대적으로 견고한 섭리가 어긋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내리면 어떤 대응을 할지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으면서, 그저 섭리를 지킨다는 명목 하나를 깃발처럼 내걸고, 베로니카는 장원으로 떠나는 길에 올랐다. 신의 규칙마저 비틀어버린 우악스러운 미지의 손길에 자신이 맞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가장 나중에 고려할 지점이었다.
베로니카는 이미 너무 많이 꺼내 읽어서 접힌 가장자리가 매끄럽게 닳아 버린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서 꺼내 읽었다. 초대장은 총 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 장은 장원을 방문하는 것에 대한 상투적인 홍보문이었고 다른 한 장은 게임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그 두 번째 페이지에는 아마 장원주의 친필로 짐작되는 유려한 글씨체로 그녀의 역할에 대한 제안과 그녀가 장원에 머무는 동안 철저히 지켜야 할 규칙들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지하 통로의 관리자’라. 그녀는 머릿속으로 지하 통로란 어떤 형태일지, 용도가 무엇일지, 너무 좁거나 심한 악취가 풍기지는 않을지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형태를 그려 보려고 해도 지하에 마련된 수많은 길과 방들이 있는 구역이라는 단어에서는 단 하나의 불길한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카타콤베. 그녀는 한때 로마를 순례하면서 카타콤베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둡고 서늘하고 눅눅한 땅 안에 구불구불하게 뻗은 수많은 가지와 그 가지마다 무수히 안치된 시신들이-아무리 신앙을 위해 목숨마저 내던졌던 숭고한 이들의 묘지라고는 해도 묘지는 묘지였다. 천국, 그러니까 내세를 굳게 믿어야만 하는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그곳에서 두 번은 맡고 싶지 않은 짙은 죽음의 향기를 느꼈다. 묘지에 잠든 이들은 천 년 전에 죽어서 더는 문드러질 살갗도 힘줄도 없으니 시취가 느껴질 리는 없는데도, 텁텁한 흙먼지 냄새나 퀴퀴한 습기 냄새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불유쾌한 공기가 지하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더랬다.
기분 나쁜 상상은 그만하자, 베로니카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으며 생각의 방향을 바꾸려고 애썼다. 분명 장원이라는 곳의 지하 통로는 카타콤베와는 다를 것이다. 우선 그 명칭부터가 시신을 안치하려고 만든 묘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통로다. 당연히 삭아 버린 수의를 입혀 놓은 말라비틀어진 유해 따위도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천천히 심호흡하고 너무 많이 읽어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은 초대장의 다음 부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장원은 그녀에게 있어 완전한 미지의 장소였다. 게임의 일부로 장원에 초대받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게임의 목적이나 구체적인 진행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규칙을 이해하려고 해 보았다. ‘밤 열한 시가 지난 뒤 장원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관리자는 지하 통로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든가, ‘지하 통로의 입구를 임의의 판단으로 열어서는 안 됩니다’ 따위의 규칙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수 규칙인 지하 통로의 존재가 전체 게임의 흐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지하 통로 안에서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도 마십시오.’
‘정상적인 지하도의 벽면에는 검은색 돌로 표시된 이정표가 박혀 있습니다. 실수로 벽에 그림 또는 문자가 있는 구역으로 진입했을 시 더 이상 나아가지 말고 멈춘 뒤 눈을 감고 뒷걸음질로 그 구역을 빠져나오십시오. 벽의 지시를 믿거나 읽고 따라서는 안 됩니다.’
‘지하 통로를 이용하는 생존자에게 최대 한 번의 발화가 허용됩니다. 절대로 두 문장 이상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 생존자가 게임에 대해 말을 할 경우 대답하지 않고 듣는 것은 가능합니다. 생존자가 지쳐 있더라도 부축을 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 주의하세요.’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규칙들. 게다가 이 부분의 문장들은 펜촉에 가하는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는지, 글씨의 굵기가 군데군데 어색하게 달랐다. 초대장의 첫 번째 장은 활자로 찍힌 것이어서 대량으로 인쇄된 페이지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페이지는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글씨여서 ‘오직 그녀만을 위한’ 안내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하 통로의 안내인이라는 직책은 장원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 것 같았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흔한 역할로 장원에 잠입하고 싶었지만-어쨌든 장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직접 방문하려면 장원주의 초대가 있어야만 했고, 장원주는 그녀에게 지하 통로의 안내인 역할을 특별히 제안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베로니카는 그녀의 목적을 위해서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 참가하는 다른 사람도 다들 그녀와 같은 상황에서 마지못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을까? 장원주는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었을까-아니면,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치명적인 함정을 깔아 놓았을까?
베로니카는 기차 창문에 이마를 대어 눌렀다. 서늘한 기운이 이마에서 두개골로, 그 안의 뇌까지 이어져 스미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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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또 기차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 도착한 장원은 베로니카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음울한 곳이었다. 분명히 규모가 대단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잘 손질된 정원이 베로니카를 반겨 주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한눈에 음습한 적의를 읽어냈다. 새로운 참가자를 반기려고 모인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몇몇 생존자들이 장원의 홀에 서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짙은 피로감과 우울함-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지 못할 꿈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실망이 담겨 있었다. 베로니카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무례하지 않게 훑어보며 그들이 이곳에서 분담한 역할들이 무엇일지 추측해보려 애썼다. 흙물과 풀물이 든 낡은 밀짚모자를 쓴 여자, 몹시 성마르고 깐깐해 보이는 안경 낀 남자,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며 고운 보랏빛 벨벳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여자, 심지어는 알록달록한 공들을 공중에 빠르게 던져올렸다 받아내며 저글링을 연습하는 어릿광대 옷의 남자까지. 그야말로 ‘게임’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전혀 통일감이 없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새로 게임에 참가하게 된 베로니카 플레처입니다.”
베로니카는 예의를 갖춰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적막뿐이었다. 마치 비웃음처럼 들리는 속삭임들이 그녀의 인사 뒤로 사각사각 피어올랐다. 그녀의 인사를 받은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에 어리숙한 신참이로군,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옷차림만 보아도 장원 밖에서는 끼니를 잇기 힘들었을 것이 훤히 보이는 하류층의 사람뿐만 아니라, 말쑥하고 값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그러니까 기본적인 상류층의 매너를 알고 있을 사람조차 그녀의 인사를 대놓고 못 본 체했다. 다른 생존자들의 냉담함을 뼈저리게 느낀 베로니카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무안하고 초조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베로니카의 인사에는 무시로 일관하던 그들은 자신들끼리는 가볍게 안부를 묻거나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 단순한 고참들의 텃세인지, 아니면 그녀의 ‘역할’에 대한 적의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조용하고 낮은 여자 목소리가 식당으로 이어지는 문간에서 들려오자 홀에 있던 생존자들은 무리를 지어 식당으로 몰려갔다. 베로니카는 손에 든 무거운 트렁크를 홀 구석에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섞이려고 애를 쓰며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도무지 직업을 추측해볼 수 없는 이국적인 옷차림의 여자 한 명이 테이블에 접시들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었다. 이미 꽤 많은 수의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식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식당에 들어찼다. 그녀 역시 홀에 있던 생존자들과 다를 바 없이 베로니카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베로니카도 먼저 인사를 건네고 자기소개를 하는 대신 조용히 빈 자리에 앉았다. 이토록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도 화기애애한 동료 의식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다 함께 식사를 시작하기는커녕 서로 대화 한마디 없이 제멋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앉건 말건 한없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입에 넣고 씹었다. 말 그대로, 그들 목숨을 한 끼의 시간만큼 더 연명하기 위한 밋밋한 식사일 뿐이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갖가지 음식들이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느릿느릿하게 수프에 빵 몇 조각을 찍어 먹고는 식사를 마쳤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삭막한 식탁에서 무엇을 더 먹어 보았자 소화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반들반들 윤이 나는 호두나무 식탁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제 옆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려 보았지만, 그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베로니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훌쩍 식탁을 떠나 버릴 뿐이었다. 베로니카는 다시 홀로 돌아가 트렁크를 들고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자신에게 할당된 방을 찾는 데에는 몹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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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던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이 되자마자 베로니카는 곧장 지하 통로의 관리인 역할로 ‘게임’에 투입되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넷씩 한 조가 되어 게임이 치러지는 장소로 가는 모양이었지만 베로니카는 지하 통로의 출구를 열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입구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에게는 입구이지만 다른 생존자들에게는 출구인 곳으로 들어가서, 자신에게는 출구이지만 다른 생존자들에게는 입구인 곳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녹슨 열쇠로 지하도로 향하는 문을 딴 다음, 일렁거리는 초 한 자루를 치켜들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히며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베로니카는 촛불을 높이 들어 가능한 한 멀리까지 빛을 퍼트렸다. 수많은 벽과 복도의 그림자가 불꽃의 흔들림을 따라 어지럽게 일렁였다. 그녀는 천천히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갈림길은-그것을 갈림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앞과 좌우, 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뒤까지 포함하면 총 네 방향이겠지만 그녀는 뒤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초대장에는 분명 검은 돌로 이정표를 표시해두었다고 쓰여 있었는데, 그녀 주위의 벽은 아무것도 없는 말끔한 잿빛이었다. 그러니까 이정표가 박혀 있는 벽이 나타나 그녀에게 올바른 방향을 알려줄 때까지는, 베로니카는 무작정 이 암흑 속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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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앞으로 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방향을 선택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앉았다. 정말로 이상한 미궁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었는데도 막다른 길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느 방향으로든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복도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보통의 미로에는 명확하게 틀린 길이 있다. 들어설 때는 틀린 길인지 알지 못해도, 어느 시점에서는 잘못된 길임을 눈치채는 구간이 있다. 그러나 이 지하도는 달랐다. 어느 길이 틀린 길인지, 그리고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구조였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 무수한 통로가 엮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매일같이 이 미로를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거지, 심지어 좌표를 외울 수도 없이 매번 바뀌는 출구를 찾아서…. 베로니카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정말이지 미쳐버리기 딱 좋은 미로였다.
베로니카는 어둠도, 고요도, 닫힌 공간도 그다지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이런 깜깜하고 눅눅한 지하 공간에서 창궐하는 벌레나 곰팡이 따위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만약 그녀가 앞에서 열거한 것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싫어하고 무서워했다면, 그녀는 매일같이 주어지는 임무를 이행하다 못해 장원을 찾아온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실성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을까, 그녀가 쥔 초가 반 토막이 났을 무렵 베로니카는 겨우 첫 번째 이정표를 찾았다. 검은 돌은 그녀의 오른쪽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번 이정표를 찾고 나니 다음 것은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다음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망설임 없이 한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녀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정신없이 꺾어지는 이정표의 지시를 따라 달렸다. 이미 이 미로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써 버렸고, 지하 통로의 입구가 열리는 소리 또한 몇 분 전에 희미하게 울렸다. 아마 이 미로의 끝에는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단 한 명이 그녀의 인도를 기다리고 섰을 것이다. 어쩌면, 운이 좋다면.
베로니카는 기대감에 가득 차서 마지막 이정표가 가리키는 그대로 왼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일 제곱미터나 될까 말까 한 통로의 입구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희미한 빛과 녹색 후드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늦었군.”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딱히 불만족스럽거나 짜증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막 첫 게임을 치르는 풋내기였으니까. 베로니카는 무어라 변명을 하려다가 ‘안내를 받는 이에게 두 마디 이상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칙을 떠올리고는 사과의 의미로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묵묵한 발걸음으로 안내를 받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왔다.
남자가 그녀에게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졌을 때, 베로니카는 그에게서 훅 끼쳐오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놀라서 촛불을 그에게 비추어 보았고 곧 아연해져 뒷걸음질 쳤다. 녹색 후드를 입은 남자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멍과 상처가 옷 밑으로 드러난 살갗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베로니카는 그렇게 물어야만 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팔뚝을 쓱 훑어보고 대꾸했다.
“신경 끄고 안내나 해.”
베로니카는 심한 부상을 입고도 아랑곳 않는 그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녀는 두 번째 질문을 할 수 없는 몸이었기에 마지못해 그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정표를 거꾸로 따라가는 내내 자신의 뒤에서 울리는 절뚝거리는 발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부축을 해 줄 수도, 뒤로 돌아 다시 한번 그의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다. 그리 길게 살펴보지도 못한 남자의 처참한 몰골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베로니카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다른 생존자들이 제게 그렇게 냉랭한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직책에 대한 불평은 배부른 소리였다. 생존자들의 ‘게임’이 어떤 민낯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나니 자신의 역할이 일종의 특별 대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이 관리인 자리를 원한 적은 없었지만 특혜는 특혜였고, 그 때문에 다른 생존자들에게 까닭 없이 밉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촛불 빛에 늘어진 제 그림자 위로 힘겹게 절뚝절뚝 겹쳐지는 남자의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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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게임이 지난 뒤로 몇 주가, 그리고 다시 몇 달이 흘렀다. 베로니카는 천천히 자신을 향한 다른 생존자들의 무관심한 태도에 익숙해져 갔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만의 변화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관성 속에서 천천히 무뎌진 생존자들의 적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원 역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천성이 나쁜 사람들만은 아니었기에 생존자들 가운데 일부는 베로니카에게 호의적인 제스처를 취해 보이기도 했고 그간의 냉랭한 태도를 은근슬쩍 철회하기도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하 통로의 관리인이라는 역할이 절대로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생존자들은 모두 지하 통로가 얼마나 어둡고 음침하고 소름 끼치는 무채색의 공간인지 알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베로니카가 다른 생존자들보다 물리적으로는 안전한 직책을 맡았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썩 달갑지 않은 장소에 종일 혼자 못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을 다른 생존자들도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로니카와 다른 생존자들이 아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선 장원의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적대하는 것이 기본자세였으며 다음으로 베로니카는 애초에 필요 이상으로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신학자가 굳이 사교를 즐겨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러한 성격이 오히려 본업에 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점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생존자들과 베로니카는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선에서 기묘한 우방 관계를 지속해갔다. 베로니카는 아무에게도 먼저 이름을 묻지 않았다. 다른 이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옆에서 주워듣고 기억해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베로니카에게 먼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며 이름을 알려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처럼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다가도 곧 성(聖)의 얼굴을 벗어던지고 남루한 속(俗)의 얼굴을 하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 피오나 길먼. 그녀는 때로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고압적인 투로 다른 사람들한테 명령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으나, 그 반대로 비굴할 만큼 고분고분한 태도로 다수의 의견을 따르기도 했다. 베로니카는 그녀가 전형적인 비겁자일 것이라 판단하기도 했었지만, 그녀는 같은 날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상대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가 일쑤였으니 사람을 가려 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데 붙은 두 얼굴을 가졌다는 고대의 신과도 같아 보여서, 베로니카는 어쩐지 그녀를 다른 사람들처럼 대하기가 영 어려웠다.
장원의 사람들은 저마다 바깥에서 종사했던 생업의 기술을 활용하여 게임에 이용하곤 했는데, 그 여자가 장원 바깥에 있었던 시절 그녀의 일은 샤먼이었더랬다. 샤먼-무당이라고도 하고 영매사라고도 하는 업, 베로니카는 정령과 혼을 불러들이고 약초를 태우며 수정구를 들여다보는 고전적인 점술가의 모습을 생각해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자신이 영의 세계와 소통할 방법으로 알바에게 추천해주었던 비과학적인 방법들이 떠올라서, 어쩌면 알바에게는 이 여자가 좀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냉소적인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신학자와 샤먼은 완전히 구분되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영이 물질계에 영향을 미침을 인정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는, 같은 출발점에서 상이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직종이라고나 할까. 다만 신학자에겐 ‘권능을 가졌으나 신이 아닌, 신 이외의 존재’를 신의 품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여겼고, 샤먼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세상 만물의 구성 원리 그 자체인, 그런 기묘한 공존-
어쨌든 그 여자 피오나 길먼은 베로니카를 처음부터 적대한 적 없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종종 몽롱하고 묘한 눈빛으로 베로니카의 전신을 훑어내렸는데, 그럴 때면 베로니카는 거친 사포로 살갗을 쓸어내리는 쓰라린 느낌과 물거품처럼 부드러운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는 야릇한 느낌을 동시에 받고는 했다. 그녀의 시선은 베로니카 그 자체를 바라보기보다도 그 이면의 것을, 베로니카가 소속된 세계를 읽어내려는 시도 같아서 베로니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베로니카를 향한 피오나의 시선은 한 공간에 같이 존재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을 응시하거나 책 속의 인물을 꿰뚫어 보는 것에 가까웠다. 대체 어째서였을까? 왜 피오나는 자기 자신의 세계와 베로니카의 세계가 ‘단절’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먼 곳을 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을까?
“당신은 처음이 아니군요.”
언젠가 피오나는 어둑한 지하 통로에서 베로니카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요 속에서 아무 맥락 없이 툭 던져진 알쏭달쏭한 말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인가요, 그건?”
“내 말을 당신이 이해한다면, 그건 당신이 드디어 처음에 도착했다는 뜻이지요.”
노래처럼 고운 음색의 짧은 웃음소리가 지하도 안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처음이란 것은 처음엔 알 수 없죠. 사람들은 처음이 지나고 난 뒤에야, 처음이 아니게 된 뒤에야 한때 자신이 처음에 있었다는 걸 알게 돼요.”
피오나는 장난 같은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베로니카는 두 번 묻지 못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피오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두 여자의 발소리와 이따금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이 메운 지하도 안을 흘렀다.
지하 통로로 내려와 베로니카의 안내를 받는 이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해 있을 때가 많았다. 생존자들은 어느 쪽으로든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릴 만큼 초조하고 두려운 게임장에서 이제 막 벗어난 상태였고, 그 와중에 베로니카의 안내를 받는 이들은 동료를 버리거나 빼앗기고 지하로 뛰어든 이들뿐이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피오나도 겁에 질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를 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피오나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자신이 체득한 지혜 안에서 퍼 올린 한 잔의 흔들림 없는 물과 같이 고요했다. 베로니카를 무섭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려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아니라, 오히려 호의로 읽힐 만큼 진실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체 피오나는 무엇을 알려주려고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했을까?
베로니카는 지하도를 벗어나 규칙의 효력을 내려놓아도 좋게 된 순간 피오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피오나는 한사코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피오나는 베로니카의 의문들에 단호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며, 마치 그 지하도에서 그녀들 사이를 오갔던 짧은 선문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눈 이야기를 날빛 아래에선 감추고 싶은 것마냥, 혹은 정말로 신탁에 입술을 빌려주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델포이의 무녀 퓌티아처럼.
*
피오나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을 듣고 나서도 한동안 베로니카의 일상은 별 탈 없이 무사하게 지나갔다. 그녀는 보통의 게임 참가자들과 다를 바 없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했고 소등 시간이 되면 침대에 들었으며 자신이 배정된 게임 시간에는 잠시 장원을 떠나 안내자로서의 책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섭리의 뒤틀림이나 자신을 한 층 더 높은 깨달음의 차원으로 이끌어 줄 진리가 장원에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베로니카도 날이 가고 게임이 거듭될수록, 어쩌면 이곳은 그저 정신이 조금 이상한 호사가 귀족의 터무니없이 비싼 취미를 실현하는 장소가 아닐까,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장원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베로니카는 신중한 성격이었고, 그래서 이곳이 정말 신학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유흥의 자리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굳이 손을 뗄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떠나기를 원할 때 떠날 수 있다는 보장 자체도 없기는 했지만 베로니카는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냄비 안의 개구리는 물이 끓기 전까지는 뛰어나갈 시도를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냄비의 물은 갑작스럽게 끓어오른다. 그전까지 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사지를 나른하게 풀리게 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과 판단 능력을 빨아들여 조금씩 잃어버리게 할 뿐이다.
*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베로니카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식당에 있었다. 접시와 그릇이 식탁 위를 오갔고, 수프를 담기 위한 국자와 고기를 잘라내려는 나이프들이 식탁 중앙의 음식 접시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그날의 메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다른 날들과 비슷하게 빵과 수프, 그리고 샐러드와 닭 요리 따위가 제공되었을 거라고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무런 대화 없이 나누는 저녁 만찬의 맛은 언제나처럼 그저 그랬다.
식사 도중 갑작스럽게, 베로니카는 식기를 든 손을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이질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입안에 든 음식을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알 수 없는 감각의 정체를 밝혀내려 애썼다. 그녀가 지금 입에 물고 있는 것이 빵조각이 아니라 막 부화하려는 뱀의 알이라도 된 것처럼, 베로니카는 힘겹게 음식의 맛을 느끼고 삼키려 했다. 고작 몇 초의 시간 사이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주홍 촛불이 상앗빛 식탁보 위에서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옆 사람의 숟가락이 수프 그릇에 부딪히는 맑은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설탕과 가염 버터를 맛보았다.
그녀는 고기 요리에 뿌려진 흰 후추와 정향, 육두구의 섬세한 향기를 맡았다.
그녀는 찻주전자에서 그녀 쪽으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베로니카의 오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한순간과 그다음 한순간 사이에 완전히 똑같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맡았으며 느꼈다. 하지만 무언가가 치명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한낱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명확하게 명명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든 메뉴는 식탁 중앙에 놓인 큰 접시에 가지런히 담겨 있고, 원하는 만큼 따로 개인 접시에 덜어서 먹는 방식이었으니 음식이 잘못되었다면 그녀 혼자의 문제일 리가 없는데도, 다른 생존자들은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 태연하게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오늘은 음식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베로니카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혼란에 빠져 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이 이상하다고 말을 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음식의 색도, 맛도, 식감도, 평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뛰어난 맛도, 역겨운 맛도 아니었다. 찬사나 불만을 제기하기에 이 저녁 식사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질감은 분명 그녀의 뱃속에 천천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
그 이질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 아홉 시가 넘어서야 베로니카는 평소와 다른 뻐근한 몸으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눈꺼풀을 사정없이 비집는 햇살을 걷어내려고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얼굴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었다.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늦잠을 잤던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끔 밤을 새워서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하거나-혹은 알바에게 보낼 편지를 써 내려간 다음 날이 아니면 베로니카는 늘 해가 뜰 무렵 재깍재깍 일어났던 것이다. 혹시 어제 신체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무리를 했었던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늦잠의 원인이 될 만큼 중대한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 그런가, 하며 농담처럼 웃어넘기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나이라는 십 대는 지났지만,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여자였다.
그녀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녀의 이면에 한 번 뿌리를 내린 이질감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일상을 좀먹어 들어갔다. 마침내 그 이질감이 평범함이 되고 비일상이 일상이 될 때까지. 그녀는 매일매일 잠자리에 들기 직전보다도 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고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은 날들이 계속됐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머릿속은 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해서, 예전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사고와 판단마저도 천천히 무디게 녹슬어갔다. 그녀는 분명 매일 저녁 소등 시간부터 동이 틀 때까지 대략 여덟 시간가량을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실제로 잔 것은 한두 시간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 연구에 침식을 잊을 만큼 매진하기도 했던 불과 몇 달 전까지의 그녀는 그리 잠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베로니카는 스스로 이 변화를 더욱 당혹스럽게 느꼈다.
천천히 그녀의 일상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원에서 일상적으로 처리하던 모든 일에 힘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서재를 찾아가 책을 읽던 일정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세탁실에 들러 자신의 의복을 정리하는 것마저 자주 건너뛰어 며칠이나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 침대에 들 때 잠옷으로 갈아입기는커녕 아침마다 긴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땋던 습관마저 망가지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느낌을 넘어 구역질까지 느껴지는구나, 베로니카는 물에 잠긴 것처럼 몽롱하고 둔한 머리로 겨우 그런 생각을 했다. 음식을 집어 올리기 위해 포크를 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고 피곤했다. 뭔가를 씹어 삼키기 위해 턱과 혀를 움직이고 목 근육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그녀는 수면 장애를 앓기 시작한 뒤로 자주 식사를 걸렀다. 베로니카는 다른 생존자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멍하니 홀 구석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거나 쪽잠을 잤다. 이상하게도, 소파에 구겨지듯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누리는 몇 분의 휴식이 침대에서 자는 여덟 시간의 잠보다 더 달았다.
*
그나마 게임 참여는 장원에 머무는 한 피할 수 없는 의무였기에 꾸준히 이행하기는 했지만, 베로니카는 어둡고 눅눅한 지하 통로를 헤맬 때마다 통로 끝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동료들이나 거의 다 녹아버려 곧 꺼질 초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더럽고 축축한 지하도에 누워 자고 싶은 욕망을 눌러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안내를 받기 위해 지치고 다친 몸을 가누고 서 있는 생존자를 찾으려 뛰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느릿느릿하게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아주 신중하게 미로를 헤맸고, 첫 번째 이정표를 발견하더라도 기쁘게 방향을 바꾸기보다 엷고 긴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게임이 끝났는데도 지하 통로로 내려온 생존자가 없을 때는 괜스레 걱정도 되고 초조해지던 예전과 달리, 그녀는 텅 빈 복도 끝을 볼 때마다 아무런 감정의 소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고 해서 베로니카의 안내를 받을 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생환자를 환대하는 것도 아니어서, 베로니카는 이제 자신에게 허락된 한마디의 말도 굳이 사용하지 않고 묵례만을 건넸다. 그녀는 저를 따라오는 사람이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이-심지어는 심하게 다쳐 걷기가 힘든 경우에도 그를 신경 쓸 여유 없이, 터덜터덜 이정표를 되짚으며 지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Doubt Yourself
그 이상한 문구를 발견한 것은 어느 날, 다른 생존자 없이 끝난 게임에서 혼자 컴컴한 지하 통로를 초 하나에 의지하여 걷고 있었던 순간의 일이었다. 잿빛 벽에 박힌 까만 돌로 표시된 이정표 아래에, 누군가 백묵으로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글씨는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 때문에 조금 흐릿했고 조금 번져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그 문장을 읽어낼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어 읽은 순간 그녀의 등줄기에 얼음처럼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게임장과 장원을 잇는 지하 통로는 게임이 있을 때만 열린다. 그리고 지하 통로로 들어오는 입구는 게임에 참가했던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지하 통로에서 나가는 출구는 베로니카만 열 수 있다.
그 간단한 사실은 베로니카나 그녀의 안내를 받은 다른 이가 벽에 글씨를 쓰지 않았다는 확신과 엮이면 어떤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 지하 통로에 누군가가 있다. 그녀의 안내를 받지 못한 누군가가 지하도 안에 있다. 이 수많은 벽과 복도들 건너에 정체를 모를 누가 있다….
베로니카는 입 밖으로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그것은 정말로 소름 끼치는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를 덮친 공포는, 그녀가 ‘안내’에 실패했을 가능성이었다. 아주 천천히 미로를 헤매며 다가오고 있는 베로니카를 기다리다 못한 어떤 게임 참가자가 그녀를 마주 찾아 나섰다가, 혹은 스스로 지하도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다가 이 흑암의 미로 안에서 영영 길을 잃어버렸다. 이 미로의 유일한 광원은 베로니카가 든 작은 초 한 자루뿐이다. 빛이 없으면 이정표를 읽을 수 없고, 매일 바뀌는 출구를 찾아낼 수도 없다. 설령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던 생존자가 탈출 당시 게임용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베로니카는 게임에 사용되는 손전등의 수명이 매우 짧은 것을 두고 불평하던 다른 생존자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손전등의 전구는 내구성이 끔찍한 수준이라서, 고작 몇십 분도 켤 수가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운 좋게 거의 쓰지 않은 손전등을 들고 지하도로 들어왔더라도 길어야 한 시간가량이 지나면 그 운은 끝난다. 그러면 그 생존자는 그때부터 끝없는 어둠 속을 헤매야 한다.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 무한히 뻗어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복도를 헤매며,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베로니카만 열 수 있는 문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도 이 미로 안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곰팡내 나는 석조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절대 무슨 병균이나 미생물이 섞여 있을지 모를 그 물로 목을 축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지하도 안에 있다. 어디에, 그리고 언제부터? 베로니카는 공포를 꾹꾹 눌러 참으며 머릿속으로 지하도에 아무도 없었던 날이 언제언제였는지를 헤아려 보았다. 가장 최근의 ‘지하 통로가 열렸으나 생존자는 없었던 날’은 그러니까-최소한 닷새 전이었다. 최소한 닷새 전의 누군가가 이 지하 미로에서 길을 잃었다면 그는 아직 살아 있을까? 베로니카가 닷새 동안 몇 번이나 게임을 치르면서 지하도를 돌아다녔어도 낙오된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미로를 헤매다가 아주 멀리 가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만에 하나 낙오자가 이 근처의 복도에 있다면 베로니카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찾거나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베로니카의 비명은 온몸에 퍼지는 혈액처럼 좁고 복잡하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사방으로 흘러나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한히 많은 벽에 부딪힌 수천의 메아리만 그녀를 향해 마주 비명을 질렀을 뿐이었다.
*
지하도에서 백묵으로 갈겨쓴 문장을 발견한 날부터 베로니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저승 같은 지하도를 헤매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 속 그녀의 손에는 이미 다 녹아 버린 초의 흔적만이 얼룩덜룩한 촛농 자국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지하도 벽을 더듬으며 손끝의 감촉만으로 필사적으로 이정표를 구분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어느 벽에도 까만 돌 이정표는 붙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이정표를 만져보고도 식별하지 못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 베로니카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명을 토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어떤 극심한 공포도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흐느껴 울며 바닥에 널린 백묵을 주워 벽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Doubt Yourself.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아득하고 빽빽한 심연을 헤매며 출구를 찾는다. 저 먼 곳에서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비명이 벽과 천장과 복도에 부딪혀 무수한 메아리로 흩어지고….
이내 그녀는 눈을 뜬다.
*
베로니카는 멍한 눈으로 서재의 서가를 쭉 훑어나갔다. 수면 부족만으로도 모자라 매일 밤 지독한 악몽이 그녀를 찾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는 그저 하루빨리 장원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장원을 떠나려면, 여기에 그녀가 찾는 것이 없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장원의 모든 정보를 조사해야만 한다. 그녀는 손 닿는 대로 몇 권의 책을 뽑아 들고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걸리버 여행기>라든가 <블러디 퀸> 따위의 유행하는 소설 따위는 옆으로 제쳐놓으려던 그녀의 손길이 어느 한 권의 표지에서 멎었다.
<심연의 부름>. 장원주가 보낸 초대장의 봉납에 찍혀 있던, 아홉 낱 이파리의 양치식물이나 아홉 머리의 괴물을 연상케 하는 문양이 그 책의 앞표지에 그려져 있었다. 가죽으로 싸인 표지에 오목하게 음각된 그 문양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책배에 비죽 튀어나와 있는 끈을 잡고 페이지를 열었다.
“...편지?”
책의 가름끈인 줄로만 알았던 붉은 리본은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편지 봉투를 묶은 끈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끈을 풀고 봉투를 열어 그 안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냈다. 아무도 꺼내 읽지 않을 것처럼 먼지 쌓인 소설책을 통해 연서를 주고받는 청춘 따위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자신 외에 장원의 서재를 드나드는 생존자가 몇 명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음침하고 서늘하고 집요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쪽지를 펴서 그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상반되는 것들은 매우 강하고 집요하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굴레와도 같다. 음존재를 이용한 무한동력 연구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음의 세계에 있는 에너지는 반드시 양의 세계에서 그와 쌍을 이루는 힘과 함께 움직이는데, 양의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사용하려면 에너지가 담겨 있는 에너지원을 촉매로 사용해야 하고, 이는 곧 아무런 동력 없이도 무한히 돌아가는 기계라는 환상을 정면으로 가로막는 원칙이다. 마치 우로보로스와 같이, 자신의 꼬리를 삼키며 순환하는 뱀과 같이 한 쪽의 에너지를 움직이려면 다른 한쪽의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만약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양의 세계로 끌고 올 만큼 강한 힘을 이용한다면, 그 반작용으로 양의 세계에 존재했던 에너지를 음의 세계에 환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쪽 세계에, 그리고 양쪽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언제나 동일하게 보존되며 불변한다.
지하의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빛 아래에서만 움직이는 여자는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쌍둥이를 알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반쪽이 없다면 빛 아래의 한 쌍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빛 쪽의 여자는 영원히 어둠 쪽의 여자를 인식할 수 없다. 뒤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빛 쪽의 여자가 등 뒤의 어둠을 보려고 하면, 그녀는 저승으로 끌려들어 가는 에우리디케와 같이 순식간에 심연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그리고 빛이 끌려 들어간 어둠의 세계는 빛이 되고, 어둠이 남겨진 빛의 세계는 어둠이 된다. 이것이 곧 ‘지하의 쌍둥이 수수께끼’의 전문이다.’
*
양존재와 음존재, 지하의 쌍둥이에 대한 이상한 짧은 글을 읽은 베로니카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에너지와 영구 기관에 관한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필체가 특히 어디선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지난 수 개월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서 이제는 똑같이 따라 쓸 수도 있을 만큼 익숙해진 알바 로렌츠의 문체와 필체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경악스럽지는 않았다. 베로니카는 침착하게 쪽지를 다시 한번 읽으며 문체나 필체를 배제하고 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알바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 지극히 합리적인 반박이었다. 이 장원은 생각보다 좁다. 물리적으로는 충분히 넓지만 여기 머무는 인원이 대체 몇인가를 생각한다면 알바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생존자 신분으로 장원에 머물며 서재까지 들어와 이 쪽지를 책에 끼워뒀을 리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그의 얼굴을 신문에서 본 적도 있으니, 여기에 그가 왔다면 먼발치에서라도 반드시 알아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곳에 와서 상금 따위를 놓고 게임을 할 만큼 한가한 인물도 아니다. 연구의 표절 시비에 휘말린 그로서는 과학계에서 할 일이 더 많을 것이고, 게다가 베로니카는 장원에 오기 전에 알바에게 미리 귀띔을 해 주었다. 그러니 그가 영구 기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요한 시점에 소문 하나를 검증하겠답시고 번거롭게 직접 이곳까지 올 이유는 하나도 없다.
베로니카는 쪽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쪽지의 내용에 더 신경이 쓰였다. 특히 ‘지하의 쌍둥이’에 대한 내용. 지하에서,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쌍둥이…베로니카가 그 문장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오기 위해, 어떻게든 출구를-베로니카에게는 입구인 그곳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을 낙오자. 지난 몇 주간 애써 잊으려고 노력해왔던 지하도의 수인(囚⼈).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둑이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흘러나와 베로니카는 쪽지를 쥔 손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목구멍이 꽉 조여 오는 불쾌한 감각, 그리고 너무 많은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 제멋대로 덜덜 떨리고 있는 손발.
혹여나 자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를 찾기 위해 베로니카가 전혀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게임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최대한 많은 길을 지나다니며 미로를 밝히려 애썼다. 지쳐서 늘어져 있을지도 모를 낙오자에게 구조자가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그러나 헛수고였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낙오자가 그 불빛을 보지 못할 만큼 멀리 있는 건지. 그녀는 식사 시간에 먹지 않고 남긴 빵과 와인이 담긴 병 따위를 미로에 두고 누가 손을 대는지 기다려 보기도 했다. 축축한 바닥에 놓인 빵은 아무도 손댄 흔적 없이 조금씩 곰팡이만 피다가, 어느 날은 쥐 떼들이 그 빵 위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미로 속의 낙오자가 살아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실수로 누군가 영원히 암흑 속에서 헤매게 됐다는 지독한 죄책감과, 애초에 낙오자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대책 없는 낙관 사이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하의 쌍둥이’라는 한 줄의 짧은 구절이 저울에 얹어졌고, 그녀의 죄책감이 담긴 그릇이 아래로, 아래로 묵직하게 기울었다.
*
한밤의 지하도는 한낮의 지하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야간의 통행 금지 시간을 어기고 밤중에 몰래 침실을 빠져나온 베로니카는 지하 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둡고 습한 지하도로 들어간 베로니카는 조용히 문을 닫아걸고 나서야 성냥을 그어 초에 불을 붙였다. 원래는 초 한 자루만을 들고 출구를 찾는 것이 규칙이지만, 지금은 출구를 찾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애초에 통행 금지 시간부터 어겨 가며 자정도 넘은 시간에 몰래 지하도로 들어온 것이었으니 굳이 초를 아낄 까닭도 없겠다 싶어서였다. 베로니카는 끄트머리가 그을린 성냥을 미끄러운 바닥에 던져 버리고 구두 굽으로 짓눌러 부서뜨린 뒤 고개를 들었다.
암흑 속에서 한 남자의 머리가 촛불 빛에 오롯이 떠올라 있었다.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푸르스름한 피부와 보랏빛으로 질려 있는 입술, 그리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고양이처럼 새까만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된 금빛 눈동자.
베로니카는 잘린 숨을 삼키며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손에서 초가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찰나, 그녀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베로니카의 손에서 초를 낚아챘다. 그 서슬에 촛농 몇 방울이 남자의 손등에 흩뿌려졌지만 그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지하도의 관리인께서는 야간 통행 금지 규칙을 모르십니까?”
남자의 눈이 이상한 만족감으로 번들거렸다. 베로니카는 겁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앞길은 정면으로 다가온 남자가 가로막고 서 있으니 도망을 치려거든 왼쪽이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불을 붙인 초는 남자에게 빼앗겨 버렸고, 여분의 초는 주머니에 있었지만 여분의 성냥은 가지고 오지 않은 탓에 지금 어두운 미로로 뛰어들었다간 자신이 찾으러 온 낙오자와 같은 꼴이 될 뿐이었다.
“저-저는 찾을 것이 있어서-”
베로니카는 가능한 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턱을 들고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계단참에 서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남자는 계단 아래에 서 있는데도 그녀보다 조금 더 키가 컸다.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찾을 것이 있다, 라. 그만큼 소중한 것을 찾으러 오셨다면 당연히 벌을 받을 각오도 이미 마친 거겠지요.”
남자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베로니카는 창백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남자에게는 연민도 동정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장원의 ‘징벌자’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규칙을 어긴 게임 참가자들에게 벌을 주는 역할을 맡은 존재들이라서,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만날 일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이렇게 많은 인간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장원주가 질서를 유지하려는 속임수로 퍼트린 것일 거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베로니카보다도 훨씬 더 제멋대로에 비협조적인 다른 참가자들마저 징벌자 이야기만 나오면 낯빛을 바꾸고 말없이 규칙을 따랐기에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가보다, 그렇게 믿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베로니카는 규칙을 어겼고, 직접 그녀를 처벌하기 위해 지하도까지 내려온 징벌자를 대면했다.
*
“함정, 인가요.”
공포에 얼어붙은 베로니카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마디라고는 그게 고작이었다. 저 남자는 자신이 지하도를 나오지 못한 생존자가 있다고 믿게 하려고 벽에 글을 써놓고, 자신이 충분히 겁에 질릴 때까지 기다린 뒤, 책에 쪽지를 넣어 자신을 이곳으로 유인했다, 그것 외에는 저 징벌자가 여기서 그녀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비뚤게 올리며 낮게 웃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전부 제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울하군요.”
남자는 그녀가 지하도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해서 초조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쪽지를 써서 남겼다. 딱 거기서 거기까지는 그의 짓이 맞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작과 끝은 전적으로 베로니카의 책임이었다. 지하도의 벽에 글을 쓴 것과, 이 밤에 규칙을 깨면서라도 지하도를 수색하기로 한 것은 베로니카 플레처 본인이다.
남자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촛불을 훅 불어 끄고는 그녀의 손목을 틀어잡고 지하도 깊숙한 곳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비명을 지르면서 버둥거렸고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시체처럼 차갑고 단단하고 억센 남자의 손아귀는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굳게 쥐고 절대로 놓지 않았다.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곳저곳 비좁은 복도를 마구 헤매면서, 미궁의 한가운데로-그 무한한 미궁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납치당하는 어린 아이처럼 끌려 들어갔다.
*
다시 초의 심지에 불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멍들고 욱신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미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드레스 끝자락은 더럽고 어두운 복도를 마구 쓸고 다닌 탓에 구정물에 흠뻑 젖어 너덜거렸다. 남자의 거친 인도에 얼굴이며 몸도 벽에 몇 번이나 부딪힌 판이었으니 머리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단단히 땋아놓았던 머리채를 묶은 리본은 미로 어딘가에서 끊어져 잃어버렸고, 머리 타래는 완전히 풀리지 않아 반쯤 얼키설키 엮인 채로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구두는 양쪽 다 어느 복도에선가 잃어버려 차갑고 미끄러운 돌바닥의 감촉이 살갗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여기는 어디죠?”
베로니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초를 다시 그녀의 손에 건네주고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남긴 뒤, 뒷걸음질로 천천히 미로의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가 완전히 암흑에 먹혀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녀의 발끝에, 정확하게는 그곳에서 빛나는 수천 가지의 요란한 색채에 못 박혀 있었다.
베로니카는 겁에 질려 뜨거운 초를 꼭 붙잡았다. 이것으로 ‘벌’이 끝난 것인가? 정말 끔찍하게 두려운 체험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른 생존자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할 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당신이 결정하면 됩니다. 이대로 황금 실을 따라서 미로를 벗어날지…아니면 실을 끊고 여기에 계속 머물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사방의 어둠 속에서 배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베로니카의 발목에 엉켜 있던, 드레스 자락에서 풀려나온 금사가 살짝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실을 따라가면 다시 출구로, 아니 입구로, 아니 출구로, 되돌아갈 수 있다. 라비린토스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내자가 그녀를 이끌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자신이 딛고 선 축축한 물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빛나지 않는데 빛이 나는 것만 같은 거울 같은 표면과 그곳에 반사된 무한한 개수의 색깔들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이상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프리즘에서 수천 갈래로 갈라져 나오는 빛살들이 한데 엉켜 있는데도 색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 있었고 또 동시에 그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저마다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색채들이 너무나 강해서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그 색을 부를 수 없었다. 일례로 붉은색을 들면 얼핏 보기에도 태양, 사과, 피, 노을, 와인, 장미의 빛깔이 섞여 있었고 붉은색의 범주를 훌쩍 넘어버린 붉은 색들이, 그러니까 레몬의 붉은 색이라든가, 바다의 붉은 색이라든가, 심지어는 눈송이의 붉은색마저도 한데 섞여 어른거리는 통에 그것을 붉은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붉은색이 아닌 붉은색들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무지개색과 비슷한,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많은 다채로운 색깔들이 살아 있는 불꽃처럼 일렁이며 베로니카의 발을 적시고 있었다. 무지개의 색은 일곱 가지, 하지만 그녀의 발끝을 물들인 색은 수백 가지도 넘는 것 같았다. 불꽃보다 더 붉은 빨간색, 얼음보다 더 푸른 파란색, 황금보다 더 찬란한 금색, 칠흑보다 까만 검은색과 순백보다 더 흰 하얀색과 이 세상의 어떤 색을 섞어도 만들 수 없는 무수한 파스텔 색조의 빛살들이…. 본래대로라면 이 이상한 무채색 미로에 흩어져 적재적소에 배치되었어야 할 수천만 가지의 색채들이, 미로 중앙의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물웅덩이 속에서 탐욕스럽게 아른거리며 그녀의 발끝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진록 색이면서 청람 빛인 망설임을 단숨에 자줏빛으로 떨쳐버리고 보드라운 장미 꽃잎처럼 노란 붉은색이 도는 손끝으로 칠흑 같은 금빛 실을 끊어버린 뒤 바닷물 같은 주홍빛이면서 동시에 설익은 사과같이 푸른색을 띠기도 하는 새까만 백은 빛 웃음을 지었다.
ⓒLeParadis_Per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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