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久적인 열망
2023. 7. 16.

 

 

 

이야기는 먼 오래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마차가 사람을 태우고 도로는 정돈이 덜 된 시절, 등잔에 기름을 채워 어둠을 밝히던 때. 신앙이 때때로 과학보다 더욱 사람들을 깊게 매료시켰으며 지적 호기심이 불처럼 타오르던 시절. 두 친우가 우애를 다지던 때로 돌아갑니다. 

 

 

알바 로렌츠는 헤르만 발자크와 발명가로서의 명목을 유지해갑니다. 그들은 젊었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신앙에 굽히지 않는 하나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구기관, 외부에서 어떠한 에너지의 공급도 없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가상의 기관. 그것을 해내는 것은 당시 헤르만 발자크에겐 삶의 목적과도 같았으며 최종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알바 로렌츠는 그런 동료를 옆에서 지켜보며 토론과 논의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초기 시절 그들은 테이블에서 열띤 토론을 펼치느라 차가 식어가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꺼져가는 등잔불의 기름을 채우는 것도 잊은 채 잉크를 몇 통씩 소비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급진적으로 나아갔고 양피지를 본인들의 필체와 무궁무진한 지식으로 가득 채워나갔습니다. 그러나 알바 로렌츠는 곧 하나의 가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영구기관이란 것이, 만약 달성할 수 없는 과제라면? 알바의 시선이 헤르만에게 향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때때로 불안하게 부딪치곤 했습니다. 한쪽은 태우는 것을 꺼렸고, 한쪽은 너무나 빠르게 자신을 소진하며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자원과 생명은 무한이 아닌데도.

 

 

알바 로렌츠의 가정이 헤르만에게 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헤르만의 비명을 닮은 외침이 알바를 질책하기까지도. 그의 시선이 비수가 되어 꽂혀왔습니다. 처음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학문에 몰두하던 동료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바는 그제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그 무렵 알바 로렌츠는 헤르만이 얼마나 그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모를 리가요. 밤낮없이 전념하며 실패한 공식들을 지워나가던 밤들이 무수한걸요. 알바는 혼자만의 가정에 점차 버거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의 이론과 가정은 확신에 가까웠으나, 헤르만에게 그것을 납득 시키기는 도저히 불가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어쩌면 영구 기관을 입증하는 것보다요. 그즈음 알바는 베로니카 플레처라는 신학자와 그 짐을 덜어나가는 중이었습니다. 헤르만의 연구는 폐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정보를 공유하고 교류하는 것은 오직 알바 로렌츠가 유일했죠. 알바는 유동적인 사람이었고,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구 기관이라는 개념은 넓고 거대하며 아직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많은 분야의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것이 이론을 정립하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중 하나는 단연 베로니카 플레처. 신만큼 영구적인 개념에 가까운 게 있을까요? 달성 가능성이 있든 없든, 영구 기관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알바로서는 베로니카 플레처의 의견은 단연 중요했습니다. 베로니카는 알바 로렌츠와 오랜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에 대해서, 그리고 영구기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를 쌓아갑니다. 그들은 아슬하며 얇고도 깊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큰 언성이 오간 날, 헤르만은 격정적으로 실험을 재개했습니다. 실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력을 쉬지도 않고 굴렸고 알바의 불안한 시선이 그것을 쫓기도 전에 작은 스파크가 튑니다. 스파크는 곧 실패한 공식이 가득한 종이에 옮겨붙어 큰 화마를 일으켰습니다. 헤르만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동료인 알바 로렌츠를 응시합니다. 만약 당신마저 나의 연구를 부정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지 모르겠네. 알바 로렌츠는 절규과 함께 그를 끌어내려 했으나 불길은 거세게 치솟았고 헤르만은 그 자리에서 알바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존하고자 했던 열은 헤르만을 끌어안고 쉼 없이 타올랐습니다. 그에게 유언 같은 영구 기관에 관한 기록 몇 장만을 남긴 채. 알바 로렌츠는 당분간 연구를 손에 잡지 않았습니다. 동료와 연구를 지속하던 낡은 저택에 틀어박힌 알바는 유일하게 베로니카에게만 이따금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열정은 타올라 이내 모든 것을 불사르고, 마침내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 모두…. 베로니카의 시선이 단정하지만 주인의 심정을 따라 흔들리는 필체에 고정됩니다. 오랜 서신을 주고받는 동안, 베로니카는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란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무언가 숨겨진 배후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한동안 서신은 그렇게 끊기는 듯했습니다. 낡은 저택에는 베로니카가 꾸준히 보내는 서신만이 쌓입니다.

 

 

그 중 한 편지에는, 베로니카의 세심하고도 작은 위로가 담겨있었습니다. 나의 동료여, 헤르만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생을 끝마친 순간 찬란한 에테르로 변모하여 우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잊지 않음으로써 거룩하게 그를 기억합시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그가 우주로 돌아간 것을 후회하게 하지 마세요…. 등잔불에 비친 알바의 그림자가 매일 새벽마다 일그러지고 울렁입니다. 베로니카의 서신과 함께, 언제까지나.

 

 

알바 로렌츠가 베로니카의 앞으로 보낸 서신이 하나 도착합니다. 친애하는 나의 오랜, 이제는 유일한 동료에게. 전시회의 티켓과 함께입니다. 베로니카는 일정을 모두 뒤로 물리며 전시회로 향하는 길에 나섭니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회장. 그는 많은 기대를 짊어지고 영구 기관에 앞장서 나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영구 기관의 가능성을 우려하던 그의 서신과는 다르게.

 

 

커다란 기계, 헤르만이 구상하던 것을 최대한 끌어낸 듯한 모습. 물론 무한한 에너지를 창출하고 순환하는 기계로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그의 이번 발명품은 뜨거운 관심과 함께 기이한 외용을 뿜어냅니다. 베로니카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무언가 기시감을 느낍니다. 그는 정말로 이 연구를 지속하고 싶어하는 걸까? 보여주기 식에 가까운, 무언가 이끌어내야만 한다는 거대한 무게감이 계속해서 굴러가며 소음을 내는 기계에서 뿜어지는 듯합니다. 베로니카는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전시회장을 나섭니다.

 

 

그 무렵 거리에는 을씨년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청년들이 하나 둘 밤거리에서 사라지곤 한다는 것입니다. 거리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이른 시간 등불을 불어 끕니다. 신이 노하셨다는 말을 전하는 종교인들이 분노에 떨고 지식을 탐하고자 하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거리를 힘겹게 나섭니다. 서신은 그의 전시회가 이어지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헤르만의 숨결이, 그리고 베로니카의 지혜가 깃들어있는 영구 기관. 그 누구도 본 적 없고 쥔 적 없는 에테르를 품기 위한 기계가 오늘도 몸집을 부풀리며 전시회를 가득 채워나갑니다. 뭘까요, 이 기시감은. 베로니카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이 듭니다. 영구 기관은 더이상 에너지를 먹지 않은 채 영원히 그 안에서 순환하며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기관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기관은 주변을 모두 집어삼킬 것만 같아요.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나의 잘못이라고. 베로니카는 서신의 끝줄을 바라봅니다.

 

거리를 맴도는 소문은 한층 흉흉해집니다. 궁정은 통금 시간을 암암리에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연한 사고사의 연속, 대상은 창창한 젊은이들. 사람들의 소문은 바람을 타고 드디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고. 누군가의 잔혹한 목적이 이루어낸 희생일지도 모른다고. 살인, 그것은 사람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고 균형을 깨트리는 일. 베로니카가 가장 저어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베로니카는 끊임없는 기시감에 휩싸입니다. 숲에서 길을 잃고 행방불명이 된 어느 청년의 얼굴, 싼값에 고용한 화가가 그려낸 저렴한 초상화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요. 본 적이 있지 않나요? 전시회에서. 영구 기관의 미래를 선보이던 그곳에서.

 

 

베로니카는 알바 로렌츠와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받습니다. 가볍게 운을 뗍니다. 요즘 거리에 도는 소문이 무섭습니다. 세간이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당신은 괜찮은지 조심스레 안부를 묻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플레처 양. 일생동안 사람은 유한하지 않나요? 베로니카는 그 건조한 문장을 바라봅니다.

 

계속되는 영구 기관의 전시회. 처음 선보였을 때 그것의 모습은 어느 한 부분에 가까웠습니다. 그 모습만으로 무언가를 형상화했다고는 선뜻 말하기 어려웠죠. 그러나 기관은 전시회를 거듭할수록 어떠한 형체를 갖춰가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알바 로렌츠의 발명품이 획기적이고도 미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칭송합니다. 꿈틀거리며 거대한 에너지를 박동하는 기관. 열역학 법칙 아래에 아직 순응하고 있는 그것. 궁정은 그의 발명품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합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들을 이어 붙여 만든 기관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 기관의 쓰임새가 점차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려 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베로니카는 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서 그녀는 서면상으로 말고는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의 표면적인 활동 또한 전시회가 시작되고 나서는 뚝 끊겼거든요. 그녀가 그를 굳게 믿는 한, 서신에 적혀있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속내였습니다.

 

 

기관이 갖춰가는 형상, 끊이지 않는 실종, 종적을 감춘 그의 행적까지. 진상에 가까워질수록 베로니카의 불안한 마음이 커져만 갑니다. 베로니카는 불길한 가정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향해 다시금 서신을 보냅니다.

 

 

[내가 처음 당신에게 새로운 물질의 개념과 원리에 대해서 얘기해주었던 때가 떠올라요. 저는 그때 세상의 기근과 불평등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영구 기관이 그 몫을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연구의 방향은 옳은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맞나요? 염려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삶이 스러져 가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왜인지 내가 그것에 무관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 또한 큰 노파심이길 바랍니다. 여전한 당신의 동료, 베로니카 플레처.]

 

 

베로니카는 힘겨운 잉크 끝을 마침표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녀로선 노골적일 만큼 직접적인 표현임에 가깝습니다.

 

 

[……손끝이 너무 뜨겁군요. 화마가 나를 당장이고 집어삼킬 것 같아요. 이번에는 전시회는 아니지만 다른 초대장을 동봉합니다. 친애하는 당신의 동료, 알바 로렌츠.]

 

 

베로니카는 그의 마지막 문장에 정갈하게 적힌 주소를 봅니다. 놀랍지 않습니다. 오로지 학문으로만 엮인 동료를 보게 될 기회가 왔다 하더라도요. 모든 게 예견된 일이었던 것처럼 베로니카는 짐도 없이 주소지를 들고 마부를 고용하여 길을 떠납니다. 덜 마른 진흙 길을 이어나가는 마차 바퀴의 흔적은, 그렇게 숲 안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갑니다.

 

 


 

 

세월을 한참 머금은 듯한 저택은 대문을 지키는 이 하나 없었다. 주소는 이쪽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베로니카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다. 해가 저물자 하나 남은 실낱같은 빛이 끊기고 저택은 곧 애매한 어둠으로 들어앉았다. 베로니카는 저택에 들어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러 그를 찾는 외침 또한 아꼈다. 발걸음 소리는 멀리서 어렴풋하게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오셨습니까?”

 

 

바람 같은, 혹은 무거운 공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로니카는 음성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정한 구둣발 소리, 그리고 처음 보는 남성. 시선이 마주치는 건 순간이었다. 베로니카 플레처와 알바 로렌츠는 어둠에서 뻗어나온 빛줄기 속에서 처음 서로를 마주했다. 한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주고받아온 그들의 속내에 거짓은 섞여 있지 않음을 시선 하나로 확인받았기 때문에. 정적과 고요가 그들을 감싸 안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알바 로렌츠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영구 기관에 관한 얘기로 화두를 꺼냈다. 서신 속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은 또 다른 경험에 가까웠다. 베로니카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러니 염려는 한 수 접어두셔도 됩니다. 실험은 계속되고, 그 끝에 영구 기관은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요, 저의 괜한 기우일 것이라고 저도 오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로니카는 그의 말을 마무리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저택은 고요했다. 그가 오래전부터 헤르만과 연구를 지속했고, 그가 죽고 나서도 여기서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저택은 거대하고도 무겁고 어두웠다. 그는 이런 곳에서 홀로 삶을 지속해온 것일까?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서신에서 말씀했던 그 얘기 말이군요.”

 

“네, 요즘은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를 한답니다.”

 

 

베로니카는 저택의 창문 밖을 응시했다. 흐렸던 하늘은 기어코 구름을 부르고 이내 빗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때린다. 베로니카는 침묵을 거두고 얘기를 꺼냈다.

 

 

“젊고 창창한 청년들이 사라진다더군요. 어딘가에서 실종되거나, 불타거나, 너무나 일찍 생을 마감한다고. 어떠한 연결점도 없이, 죗값도 없이.”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베로니카는 시선을 돌려 알바 로렌츠를 응시했다. 그를 보면 그녀의 기분은 어딘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구석을 보였다. 분명 그런 얘기, 자신의 기시감에 휘둘리지 않고자 이곳에 걸음 한 것이 아닌가. 직접 그녀의 눈으로 사실을 파악하고 싶어서. 그러나 파고들면 들수록, 왜인지…….

 

 

“첫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치셨죠. 그 이후 나에게 서신을 넣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입니까?”

 

 

베로니카는 알바 로렌츠를 한 치의 틈 없이 바라봤다. 그의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알바 또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수차례의 전시회가 열리고 나서 연구 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떠난 관계자가 다음 날,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그의 소재를 묻는 이가 있었습니다.”

 

“플레처 양.”

 

 

알바 로렌츠의 시선은 어딘지 깊고 고요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치 오래 안면을 트고 지내는 이를 응대하는, 정말 그리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처럼.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나누어야 할 얘기들이 많지 않습니까.”

 

 


 

 

베로니카와 알바는 차가 한참을 식을 때까지 긴 이야기를 이었다. 양피지 위의 필체로 이야기를 엮어나갔던 시간들이 그들을 묶어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마치 어제도 집을 찾아왔던 친우처럼 때때로 웃었고, 회중시계를 보는 법을 잊은 것처럼 말을 나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알고 있었다. 알바 로렌츠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그의 연구를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 왔고, 그의 동료가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고, 그가 몇 날 밤을 악몽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그녀에겐 묻어둬선 안 될 하나의 소신이 있었다.

 

 

“로렌츠, 당신이 어떤 슬픈 일을 겪었는지 압니다. 모든 것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저는 이 연구의 공동 책임자가 아닌가요?”

 

 

어둠을 알지 못하는 그녀의 두 눈이 홀로 빛났다. 알바 로렌츠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연구에 있어서 막히는 법이 있다면, 하다못해 당신이 곤란해하는 일이 있다면 당신에게서 직접 듣고 싶습니다. 홀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같이 나눠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알바 로렌츠는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서신에서 줄곧 받았던 느낌과 같았다. 자신의 신념과 학문을 얘기하던 그녀는 언뜻 헤르만과 비슷하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보다 개방적이고 평등했으며 쭉 올곧은 느낌이 있었다. 무너지지 않는 하나의 선의가 있다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알바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짊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알바 로렌츠는 이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립니다. 그의 얼굴은 고뇌, 번뇌, 그리고 짙은 괴로움과 죄책감, 지친 기색이 온통 섞여 있습니다. 베로니카는 그를 바라보며 말없이 기다립니다. 알바 로렌츠가 마치 이 저택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알바 로렌츠는 웃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아주 하잘것없습니다. 모든 것이 괴로워 생각하기를 멈추고 웃어 버리는 이의 표정에 가깝죠. 알바 로렌츠는 이내 홀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하듯 그녀를 어느 문으로 안내합니다. 문의 입구는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입니다. 거대하고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그들은 어둠 안으로 들어갑니다. 무엇이 그들을 반기는지, 한 사람만이 운명을 헤아린 채.

 

 

계단은 한동안 아래로 이어집니다. 한참을 내려왔을까요? 베로니카는 저택에서 느껴지던 어둠과 쓸쓸함,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를 느낍니다. 가느다란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흐릅니다. 비단 기분 탓만이 아닙니다. 베로니카가 가장 기피하는 무언가가 그녀의 목을 옥죄고 있습니다. 베로니카는 어렵게 시선을 돌려 알바를 바라봅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지막 계단 아래, 광활하고 차가운 돌 바닥 너머 등불의 옅은 빛이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그가 짊어진 원죄와 운명을 마주합니다. 

 

 

등불의 어스름한 빛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것’을 비춥니다. 베로니카는 지금껏 살며, 수많은 서적을 접하며 한 번도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것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심장을 얽어 만든 거대한 하나의 순환체계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형체 없고 개별성이 사라진 인간들의 조각이 섞여 하나의 ‘기관’을 이루는 모습.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박동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어떠한 방해도 에너지도 받지 않고. 베로니카는 생리적인 역겨움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개별성과 생명성이 모두 부정당한 존재. 알바 로렌츠는 그녀를 바라봅니다. 

 

 

“플레처 양, 이런 걸 짊어질 수 있겠어요?”

 

 

그 한 마디를 내뱉는 알바 로렌츠의 표정은 가히 참혹합니다. 그는 눈을 감습니다.

 

 

“나는… 밤마다 악몽을 꿉니다. 화마가 나를 집어삼킬 때 다시 눈을 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죠.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곳에 남아있어요. 원망이 뒤섞인 그의 목소리를 짊어지고, 절대 완수할 수 없는 과제를 뇌리에 새긴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의 바람 같으면서도 실체를 잃어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목소리. 그의 시선과 표정에서 줄곧 비추던 죄책감 섞인 어투.

 

 

“어떻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생각을….”

 

“당신이 말했죠. 천체를 계속 운동케 하는 힘이 에테르의 원천일 것이라고. 나는 그 의미에 대해 줄곧 생각해왔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헤르만의 연구는 현존하는 물질로는 도저히 완성해낼 수 없는, 필패에 가까운 연구입니다. 추가적인 에너지 자원 없이 계속 돌아가는 기관이라니. 당신은 그게 가능하다고 봤나요?”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죠. 필패를 보완할 영성을….”

 

 

알바 로렌츠는 사납게 뛰는 심장 조각들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거대하고도 끔찍한 모양.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전시회에서 선보이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래요…. 헤르만이 내게 얼마나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나조차 이 연구의 가능성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나는 완성해야만 했어요. 나에게 남은 거라곤 이 연구뿐이었습니다.”

 

 

알바가 눈을 감습니다. 이곳은 하나의 몸, 그 안쪽과 같아요. 고요하고도 무거우며 비릿한 냄새로 가득해요. 베로니카는 그의 침묵에서 느낍니다. 그가 밟아온 과정들을, 그 소문이 돌게 된 원천을, 그가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원죄를.

 

 

“어쩌다 이런 것이 탄생하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나는 당신이 제시한 개념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유일하게 지구에서 현존하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 벅찬 생명력을 가지고 어디로 갈까….”

 

 

인간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에너지를 이을 하나의 우주가 되는 것. 에테르란, 영성이란 바로 그때의 힘이 아닐까?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여 잡아낼 수 있다면 에테르를 정수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 하나의 가정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헤르만이 살아있는 동안도 현존하는 물질로선 영구 기관을 만들 수 없다는 걸 계속해서 입증했지 않나.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었다. 알바 로렌츠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나. 아주 복합적이고도 무거웠으나, 알바는 이내 그것이 무의미한 짓임을 상기했다. 너무 까마득한 일과 같았다. 알바 로렌츠는 감정을 묻어뒀다.

 

 

“당신을 부른 것은 하나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겠어요. ……플레처 양, 당신은 이런 걸 짊어질 수 없어요.”

 

 

나는 평생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죽어서도, 헤르만에게조차도…. 그는 피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헤르만의 죽음 이후로 그는 몇 번의 악몽에 시달리고 몇 번의 고해성사를 바친 것일까요.

 

 

“이 영구 기관은 나의 하나뿐인 발명품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르만이 도출해낸 가정과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나만의 발명품. 하지만…….”

 

 

알바 로렌츠는 기관을 돌아봅니다. 거대한 심장이 뜀박질할 때마다 어렴풋한 비명이 들려옵니다.

 

 

“이건 그 누구에게도 선보일 수 없어요. 보세요, 이 괴상한 모양을. 불완전환 영구성을.”

 

 

그는 지친 기색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습니다.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놓인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 누가 이것을 온전한 발명품이라고 할까요. 이 불완전한 영구 기관은 족족 사람을 빨아먹고만 있습니다. 이것을 영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대체 내가 해온 연구는 뭐란 말입니까.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든 이건…….”

 

 

베로니카는 차마 헛숨도 내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알바 로렌츠의 행각은 발명의 목적 아래라 해도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그것도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가다니요. 그러나 그녀는 태초를 읊어봅니다. 그때 에테르의, 영성의 개념을 심어줬던 건 자신. 이 결과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는 걸까요? 그때 그녀가 영구 기관의 부정에 힘을 실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베로니카의 손이 떨립니다. 그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저지른 걸까요.

 

 

“나는 두렵습니다. 헤르만이, 이 영구 기관이, 그리고 내가 두렵습니다….”

 

 

촛불이 꺼질 듯 아스라한 음성. 절망이 그들을 감싸고 돕니다. 도저히 개인이 감당해낼 수 없는 이 어둠을 그는 얼마나 홀로 헤엄쳐온 것일지. 알바 로렌츠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촛대를 쥐고 일어납니다.

 

 

“…가세요, 베로니카. 내가 당신을 이끌었던 입구, 그리고 저택의 문까지 뛰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저택을 떠나세요.”

 

“대체, 무슨.”

 

“돌아보지 마십시오. 곧장 뛰어가세요.”

 

 

알바는 촛대를 바닥에 떨어트립니다. 불은 삽시간에 바닥에 붙습니다. 비릿한 냄새 아래 숨어있던 것은 기름의 향내였을까요? 그는 불길 아래 서서 그녀를 향해 외칩니다. 이 저택을 떠나라고. 베로니카는 뒷걸음질치며 계단을 향합니다. 몰려오는 열기에 그녀는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갑니다. 그녀는 그와 함께 걸어왔던 곳을 뛰쳐나갑니다. 저택의 천장에 있는 건물재가 하나 둘 떨어져 내립니다. 그녀는 숨 가쁘게 대문을 열고 나갑니다. 저택의 정원을 지나 마차가 있던 숲길까지 뛰어나왔을 때, 그녀는 뒤를 바라봅니다. 불길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저택을 먹어치우고 있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속절없이 쏟아지는 절망을 그대로 맞으며 저택을 응시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또 다른 것을 남기고 떠나간 겁니다. 베로니카의 창백한 낯이 불길에 물들어갑니다. 악몽 같은 그의 흔적이 그렇게 새벽 사이 불길 속에서 스러져 갑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불을 잠재울 수 없어 보입니다. 일생이 불같았고,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갔던 남자. 고작 하루 봤을 뿐인 그의 얼굴을 베로니카 플레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주저앉은 채 모든 것을 불태우는 그의 영성을, 에테르를 마주합니다. 그것은 아주 진득하고도 끔찍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악몽에 대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화수분(@flowerdbed_64) 작가님의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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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다려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 메인이지만 베로니카가 신학자로서, 또 본인의 신념이 올곧은 상태에서 알바 로렌츠라는 인물과 이 인물이 저지른 중대한 과오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 모쪼록 결말 부분이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부분은 모든 걸 태우는 불처럼 소진하며 수많은 사람을 결국 타의로든 자의로든 떠나보내고 홀로 고독한 생과 연구를 지속해왔지만 결국 자신마저도 불처럼 타오르며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알바 로렌츠에 대해 처음 했던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넣어 보았습니다! 알바 로렌츠는 실패가 정해져있는 연구와 그럼에도 이 연구를 멈출 수 없었던 동료의 한을 되물림하지 않기를 바라 저택을 불사르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그의 마음에 줄곧 걸리는 인물이 있다면 이 연구를 끝까지 같이 해주었던 베로니카 플레처겠죠. 연구의 큰 줄기를 잡아주고 자신의 연구, 나아가 방향을 잡아주는데 일조해준 베로니카가 그의 마음에 다른 하나의 책임감이 되어 눌러 붙어있었을 것 같아요. 그녀에게 이런 연구를 동참하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끔찍한 연구의 부산물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것도 그녀를 대면하면서 깨달았겠죠. 한편으로는 그녀를 온전히 믿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책망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평생을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살아온 알바 로렌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대한 책임과 함께 온전히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내렸을 거 같아요. 저택, 그리고 끔찍한 연구의 말로와 함께 종지부를 끝맺는 것. 

 베로니카가 저택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장면은 넷플릭스 [더 하우스]의 쳅터 1, 거짓의 속삭임이 떠오르더라구요. 그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장면을 보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같이 참고해서 봐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랍니다. 

 저택에 들어서 서로를 처음으로 탐색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아하는 모습에서 둘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 로렌츠는 베로니카 플레처와 평행으로 나아가며 절대 같은 지점에서 만날 수 없는 운명임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지하로 향하는 그들의 긴장감과 마침내 괴상망측하지만 두 명의 운명을 쥐락펴락했던 영구 기관의 끔찍한 실태를 묘사하는 것도 되게 재밌는 작업이었답니다. 너무 좋아하는 중세 미스테리, 그리고 잔혹한 실험의 결과...하지만 종래엔 비극을 몰고온 영구기관. 자신의 손을 벗어난 운명줄을 힘겹게 쥐고 버티느라 손에 피가 흐르는 것이 알바 로렌츠 같지 않나요...되게 처연한 미가 나면서도 굳게 다짐하여 결코 완전한 악인이라 볼 수 없는 모습도, 홀로 남겨진 베로니카의 모습도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않았던 거 같네요. 이후의 베로니카는 알바 로렌츠에 대해서 어떤 정리를 해나갈지, 모쪼록 기대되는 모습 중 하나인 거 같아요. 

 이리저리 쓰다보니 주접도 줄줄 늘어나게 되었는데, 모쪼록 즐겁게 감상하셨길 바라며 예쁜 친구들의 작업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보냅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독감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캐릭터 해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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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로니카 플레처
베로니카는 다른 이면에선 저울을 닮아있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하되 그것은 이성과 감성의 수평과도 같게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근간에 깔고 있지만 두 에너지 간의 조율을 적절하게 해내는 편입니다. 베로니카는 신을 믿기 때문에 신학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몸은 우주를 이루는 원소의 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개개인의 몸은 하나의 우주와도 같고, 그 우주가 모여 이루는 것이 신, 신학의 개념 중 한 부분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실 신을 믿기보다는 인간, 나아가 그들을 이루는 만물의 우주를 더 탐구하고자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볼 영원한 삶에 대해선 회의적이죠. 그것이 부정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주의 별 또한 무한대에 가까운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언젠가는 그것들 또한 탄생과 폭발, 그리고 죽음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일부분인 우리 인간 또한 그 순리를 따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 사실 그녀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거대 우주 아래 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졌으나 각기 다른 형태를 띤 인간들은 모양은 다르지만 베로니카의 입장에선 같은 계열의 우주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베로니카는 관찰하고, 탐구하고, 그들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볼지언정 그들을 막거나 그들의 경로를 비트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거쳐 가는 운명의 걸음을 관찰할 뿐입니다.

- 알바 로렌츠
알바 로렌츠의 삶은 거친 하나의 풍랑, 잠잠하다가도 바람에 휘날리는 거센 불길, 이따금씩 튀는 스파크와도 같아요. 그의 삶에 어느 한 인간조차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그의 삶은 매번 인간을 삼키고 뱉어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바꿔갑니다. 자신만의 발명을 하고자 했던 알바는 헤르만의 연구를 돕지만 실현성이 떨어진다는 이성의 판단과 그럼에도 친구의 계속되는 몰락을 지켜보지 못해 끊임없는 논쟁을 벌인 끝에 화마에 덮쳐져 친구를 잃고 부정하고자 했던 연구의 흔적을 얻습니다. 그것을 그저 과거의 사고로 덮어두려 했던 알바는 주변인들의 부추김과 일말의 죄책감에 젖어들며 결국은 전시회에 그의 미완성된 작품을 내놓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죽어버린 옛 동
료의 아들이 그에게 조수로 받아들여 주길 간청하다니. 얼마나 질 나쁜 운명일까요? 헤르만의 아들은 필체로 인하여, 자신이 매료되었던 그의 연구가 사실은 제 아버지이자 그의 동료였던 헤르만의 연구임을 알게 되고 제 스승이었던 도둑을 질책하게 됩니다. 알바는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은 채 겸허하게 그를 받아들입니다. 죄책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어떤 감정들이 그를 붙잡았을까요. 끊이지 않는 화마 같이 이어지던 또 다른 논쟁 속에서 이번에는 알바가 스러집니다. 그러나 운명은 끝까지 그를 풍랑 속에서 꺼내주지 않습니다. 아니, 이내 알바는 하나의 혼돈이자 풍랑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영구기관처럼 알바는 영원한 안식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묘신의 부름을 받아 사교도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사람으로 인해 피어나고 불타오르다 스러지고, 결국은 다시 빛을 삼켜 피어나는 화염, 스파크, 혹은 하나의 원소이자 충돌. 우주. 은둔자는 그렇게 모든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서도 고독 속에 남아 허무주의만을 쥔 채 헤르만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념에 갇힙니다.

- 알바, 그리고 베로니카.
같은 원소에서 태어나 하나의 우주로 가기 시작하는 두 생명체조차 잠깐 평행의 길을 걸었을지언정 늘 같은 방향을 향해 가지는 않았습니다. 장원에 도착하더라도 두 사람의 길과 방향, 목적은 언제나 변성을 간직한 채 경로를 틀어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알바는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더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베로니카는 장원의 어둠을 파헤치며 베로니카만의 목적을 가진 채 나아갑니다. 둘은 어쩌면 사실 두 눈을 가린 채 나란히 걸어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할 수는 없죠. 그것 또한 그들이 가진 숙명에 가깝지 않을까요? 운명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없듯이, 그들이 어떻게 나아갈지, 그 또한 바라봐 주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릅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간섭하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고, 결국은 폭발, 그리고 소멸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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